네덜란드는 흔히 ‘풍차와 튤립의 나라’로 불리지만, 그 단순한 이미지 안에는 훨씬 더 깊은 자연의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국토의 절반 이상이 해수면보다 낮은 이 나라는 인간과 자연이 수백 년 동안 협력하며 공존을 이룬 독특한 지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다를 막아 만든 폴더(Polder) 지대, 끝없이 펼쳐진 초원, 그리고 바람이 지나는 풍차와 꽃밭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함께 살아온 시간의 기록’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자연명소 세 곳 — 큐켄호프 공원(Keukenhof), 호헤 펠뤼웨 국립공원(Hoge Veluwe National Park), 그리고 자안세스칸스(Zaanse Schans) 풍차마을을 중심으로, 이 나라가 어떻게 자연을 예술로 승화시켰는지 살펴봅니다.
큐켄호프 공원 – 봄의 바다, 튤립이 만든 색의 향연
네덜란드의 봄은 단연 큐켄호프(Keukenhof)에서 시작됩니다. ‘유럽의 정원(Garden of Europe)’이라 불리는 이곳은 매년 3월부터 5월까지 약 700만 송이의 꽃이 만발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꽃 공원입니다. 32헥타르에 달하는 면적에 800여 종의 튤립, 수선화, 히아신스가 끝없이 펼쳐지며, 색채의 향연이 이루어집니다. 붉은색, 노란색, 보라색, 분홍색이 물결처럼 이어지는 그 풍경은 마치 거대한 유화 그림을 보는 듯합니다.
큐켄호프의 역사는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원래 이곳은 귀족이 요리용 허브를 재배하던 ‘주방의 정원(Keuken Hof)’이었으나, 1949년 네덜란드의 구근 재배자들이 세계 각국에 꽃 문화를 알리기 위해 공원으로 재탄생시켰습니다. 지금은 매년 100만 명 이상이 방문하며, 네덜란드 자연 관광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꽃을 보는 것뿐 아니라, 꽃밭 사이를 걷는 순간마다 바람이 가져다주는 흙과 꽃의 향이 섞여 오감을 자극합니다.
공원 안에는 거대한 호수, 분수, 그리고 네덜란드식 전통 다리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방문객들은 꽃길을 따라 걷거나 자전거를 타며 풍경을 즐길 수 있고, 전통 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는 체험도 가능합니다. 특히 공원 내의 전망대에서는 주변의 실제 튤립밭이 이어지는 장관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해가 질 무렵, 붉게 물든 하늘 아래 꽃들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모습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남습니다.
호헤 펠뤼웨 국립공원 – 대자연과 예술이 만나는 곳
호헤 펠뤼웨 국립공원(Hoge Veluwe National Park)은 네덜란드 중부 헬데를란트(Gelderland) 지역에 위치한, 네덜란드 최대 규모의 국립공원입니다. 5,400헥타르에 달하는 광활한 면적에는 사막 같은 모래언덕, 고요한 침엽수림, 그리고 들꽃이 만발한 초원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공원이 아니라, ‘인공과 자연의 조화’를 보여주는 실험적인 공간입니다.
호헤 펠뤼웨의 가장 큰 매력은 자연 속에서 예술을 만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공원 중심에는 세계적인 미술관인 크뢸러뮐러 미술관(Kröller-Müller Museum)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이 90여 점 이상 소장되어 있으며, 자연을 주제로 한 야외 조각 공원이 함께 조성되어 있습니다. 산책을 하다 보면 소나무숲 사이에서 현대 조각품들이 불쑥 나타나며, 예술과 자연이 대화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곳은 자전거 여행자들에게도 천국입니다. 공원 내에는 40km 이상의 자전거 도로가 있으며, 방문객은 무료로 ‘화이트 바이크(White Bike)’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얀 자전거를 타고 숲길을 달리다 보면, 노루나 야생사슴, 들토끼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여름철 아침에는 안개가 낮게 깔려, 햇살이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장면이 마치 한 폭의 회화처럼 펼쳐집니다.
호헤 펠뤼웨는 네덜란드가 자연을 단순히 ‘보존’하는 것을 넘어, ‘공존’과 ‘예술’로 승화시킨 대표적 사례입니다. 인간이 만든 미술관과 자연이 만든 숲이 한 공간 안에서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며 어우러지는 모습은, 네덜란드 특유의 환경철학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자안세스칸스 풍차마을 – 바람과 물이 만든 인간의 풍경
자안세스칸스(Zaanse Schans)는 암스테르담 근교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네덜란드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살아 있는 박물관입니다. 17세기 산업혁명 초기, 이 지역은 바람을 이용해 톱질, 방앗간, 제분소, 페인트 제조 등 다양한 산업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당시 세워진 1,000여 개의 풍차 중 일부가 지금도 남아 있으며, 실제로 작동하는 풍차를 직접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자안세스칸스에는 10여 개의 전통 풍차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각 풍차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데 카트(De Kat)’는 염료를 만드는 풍차, ‘데 주커(De Zoeker)’는 오일을 짜는 풍차입니다. 마을을 걷다 보면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거대한 날개가 천천히 움직이며, 물결과 함께 조용한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이곳에서는 바람, 물, 나무가 함께 일하며 살아온 네덜란드인의 삶의 철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안세스칸스의 또 다른 매력은 강가를 따라 늘어선 초록색 목조 가옥들입니다. 전통 네덜란드식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이 집들은 지금도 실제로 사람들이 거주하거나 상점, 치즈 공방, 목재 공예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관광객들은 네덜란드 전통 복장을 체험하거나, 치즈 시식, 나막신 만들기 같은 체험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지역의 석양은 네덜란드의 ‘시간이 멈춘 풍경’이라 불립니다. 해가 질 무렵 풍차들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강 위에 반사된 하늘빛이 은은하게 퍼집니다. 그 순간, 수백 년 전 네덜란드 사람들이 바람과 싸우며 삶을 일구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함께 만들어낸 ‘시간의 예술 작품’입니다.
네덜란드의 자연은 거대하지 않습니다. 산도 없고, 거대한 숲도 드뭅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연을 이해하고 존중해온 인간의 지혜가 녹아 있습니다. 큐켄호프의 꽃밭은 생명의 아름다움을, 호헤 펠뤼웨의 숲은 예술과 조화의 철학을, 자안세스칸스의 풍차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상징합니다. 네덜란드를 여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보는 여행’이 아니라, ‘공존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자연을 억누르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 네덜란드는 오늘날 환경문제에 지친 인류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